중명전(重明殿)에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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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그날 목놓아 운한규설 조약동의 강요하는 이토 히로부미에 韓 참정대신 “칙명이라도 복종할 수 없다” 결국 감금… 그새 ‘五賊’들 조약 체결 일제에 끝까지 저항… 재야 칩거생활 “을사오적에 맞선 인물… 잊지 말아야” 1905년 11월17일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


120년 전, 현재의 국무총리 격인 참정대신한규설은 을사조약을 끝까지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다섯 명의 대신들은조약서에 서명을 해버린다.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등으로 그들은 영원히 ‘을사오적’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권은 탄핵과 소송으로 국가적인 에너지는.


이토는 소집된 각의에 들어가조약의 서명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각의에는 참정대신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여덟 명이 참석했다.


한규설만이 목숨을 걸고 반대했고, 민영기가 서명을.


고종이 일본의 강압에 억지로조약에 서명했다는 점에서 을사늑약(勒約)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1904년 시작한 러일전쟁의 우세 속에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열강의 승인을 얻어 결국 조선을 보호국화하려 했다.


그해 11월17일 어전회의에서한규설, 민영기, 이하영을 제외한 5명의 대신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120년 전, 현재의 국무총리 격인 참정대신한규설은 을사조약을 끝까지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다섯 명의 대신들은조약서에 서명을 해버린다.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등으로 그들은 영원히 '을사오적'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권은 탄핵과 소송으로 국가적인 에너지는 휘발되면서.


을사년 새해는 과거 조선의 주권을 빼앗긴 날에 체결됐던 을사년의조약.


우리는 이를 을사년에 체결한 늑약이라 해 '을사늑약.


특히 주목할 사람은 지금의 국무총리 역할이었던한규설.


"도저히 내 뜻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한 뒤 실성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불러들여조약에 강제 서명토록 했다.


학부 대신 이완용, 군부 대신 이근택, 내부 대신 이지용, 외부 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등 5명이 서명했고, 역사는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칭하고 있다.


참정 대신한규설, 탁지부 대신 민영기, 법부 대신 이하영만 등 3명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지만.


그날 저녁 8시 입궐한 이토는 대신들을 불러 모아조약에 대한 찬반을 물었다.


답변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첫번째는 명확한 반대파였다.


민영기 탁지부대신(기획재정부 장관)은 “본 협약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한규설참정대신(총리)의 반응은 더 극적이었다.


“도저히 내 뜻을 바꿀 수가 없다”고 말한 뒤.


사실상조약을 승인하면서 책임은 대신들에게 떠민 것이었다.


이날 저녁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대궐로 들어와 8대신을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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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전회의 결과와 함께 8대신에게 일일이 찬반을 물었다.


참정대신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등은 반대했다.


이완용과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그는 “아직 고종과 참정대신한규설의 인준이 없으니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다시 일본과 담판하여조약을 파기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물러가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같은 날 다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을사오적은 당연히 베어야 한다.


당연히 베어야 할 것을 베고.